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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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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선생 상
    백범 김구선생 상
    시설
    동상
    지역
    인천광역시 부평구
    사건연도
    1876
    주제
    해외운동

    김구 선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해방 후에는 국내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힘썼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김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에 몸 바친 민족의 지도자 및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이 인천에서의 수감생활과 인천축항공사 노역 등으로 인천과 연이 깊었던 점을 기릴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당시 교장선생님의 주도 하에 1980년 부평여자중학교 내에 백범 김구선생 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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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시설
    사당
    지역
    전라남도 보성군
    사건연도
    1876
    주제
    의열투쟁

    이 비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코자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내 은거의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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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선생 이공 추모비
    수산선생 이공 추모비
    시설
    비석
    지역
    경상남도 의령군
    사건연도
    1919
    주제
    3ㆍ1 운동

    이태식의 호는 수산이고, 다른 이름은 이태곤이다. 본적은 경상남도 의령이다.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가 빠진 것을 통분하며, 한국독립을 기원하는 내용의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때 곽종석‧장석영‧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유림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는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었고, 국내외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1926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김화식‧송영호‧이봉로 등과 함께 내몽고 일대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세력 양성 등을 위한 국내의 군자금 모금에 힘썼으나, 목표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자 제2차 군자금 모금을 실시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이 군자금 모금을 감지하고 대대적 검거에 들어가 600여 명의 유림인사들이 체포‧구금되었을 때, 일본 경찰을 피해 수년 간 도피생활을 하였다. 2004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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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상
    유관순 상
    시설
    동상
    지역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사건연도
    1902
    주제
    3ㆍ1 운동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민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유관순은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만세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순국하신 유관순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백운면 부녀회에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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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경찰 전적탑
    원주경찰 전적탑
    시설
    지역
    강원도 원주시
    사건연도
    1992
    주제
    독립운동기타

    원주시 부론면에 1992년 6·25전쟁과 전후 북한이 남파한 무장공비를 격퇴한 전공을 기리고 순국한 김재덕 순경 등의 경찰관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길이 보전하고자 ‘전적탑’을 건립하였다. 원주경찰서는 이곳에서 근무하다 순직한 호국경찰과 이에 협조한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1992년 6월 5일 준공하였다. 2003년 10월 모산고개로 확장 건립했다. 6·25전쟁 기간에 원주경찰서는 취병리 범선골, 관설리 백운산 등지에 출몰한 공비를 격퇴했고, 전후에도 북한의 대남침투에 맞서 1953년 11월 15일 반곡리에 침투한 공비 1명을 생포했으며, 1965년 8월 5일 법천리에 출현한 무장공비 4명이 출현했을 때 부론지서 소속 3개 소대가 출동하여 3명을 사살했다. 1967년 9월 1일 관설리에서 생포한 무장공비를 연행하던 중 김재덕 순경은 불의의 기습으로 순직했다. 원주찰서에서는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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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봉지구 전적비
    삼천봉지구 전적비
    시설
    비석
    지역
    강원도 철원군
    사건연도
    1950
    주제
    6ㆍ25전쟁

    육군 제15사단은 1983년 10월 1일 강원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GOP입구에 삼천봉지구 전투에서 불멸의 전공을 세운 2사단 장병들의 영웅적인 투혼을 높이 찬양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삼천봉지구 전투는 1951년 8월 9일부터 9월 3일까지 중공군 제20군 예하 4개 사단의 대병력이 적근산 및 대성산을 탈취하고자 인해전술로 수차에 걸친 파상공격을 가해왔으나 우리 제2사단 예하 17연대, 32연대 및 사단 유격대대 용사들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이 일대를 사수하여 대성산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전투에서 적 사살 1, 614명, 포획 328명, 3, 477정의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등 대전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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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남의진 추모비
    산남의진 추모비
    시설
    비석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사건연도
    1906
    주제
    의병운동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영화 영일 청송 등을 비롯한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강봉학(1890~1914), 박한종(1855~1934), 전응팔(1878~1971), 조상환(1866~1908), 최치환(1875~1944) 애국지사의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널리 전하기 위해 2006년 11월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산 78-4에 산남의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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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석 조병옥선생 동상
    유석 조병옥선생 동상
    시설
    동상
    지역
    경기도 과천시
    사건연도
    1894
    주제
    민족주의운동

    태산같은 기상, 바다같은 도량, 주옥같은 연설은 이 강산의 큰 빛이요, 높은 횃불로서 민족사에 영원히 타오를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높고 맑은 절개는 민족의 귀감이며,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힘이다. 온 겨레와 함께 추모하는 마음으로 선생이 서거한 지 43주년을 맞이하여 위업과 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성금을 모으로 국가보훈처와 서울특별시의 협조를 받아 이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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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혼비(신천리)
    충혼비(신천리)
    시설
    비석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사건연도
    1950
    주제
    6ㆍ25전쟁

    서귀포 신천리에 6·25전쟁 기간에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전몰용사의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신천리 주민들은 이곳 출신 전몰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며 나아가 그들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금을 모아 1962년 10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6·25전쟁 기간 신천리 젊은이들은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3년간의 전쟁 동안 아군의 후퇴 및 방어, 반격 및 북진, 38선 인근의 고지쟁탈전, 공비 토벌작전 등에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신천리 주민들은 매년 현충일에 이들의 추모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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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현충탑
    인천광역시 현충탑
    시설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사건연도
    1950
    주제
    6ㆍ25전쟁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천출신 국군장병 379위가 남구 도화동에 안장되어 있었으나 이들을 1968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한편, 자유공원에 있던 충혼탑도 이 기회에 다시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1972년 이름을 현충탑으로 바꾸는 동시에 건립지는 수봉공원으로 결정하고 경찰 충혼탑도 새로운 현충탑에 합치기로 결정되었다. 또 현충탑 건립 부지임야 1천평은 이 사업의 뜻에 감동한 김태현씨가 기증하여 1972년 4월25일 착공하여 동년 광복절에 준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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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탑
    상록탑
    시설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사건연도
    1901
    주제
    문화운동

    심훈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연유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학수업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들은 대체로 항일정신을 고취시킨 내용으로서 일경의 검열로 중단된 작품이 많다. 선생은 1934년 장편소설 직녀성을 써서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에는 농촌 계몽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 모집에서 당선되었다. 선생이 평소부터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농촌 계몽운동을 피력한 이 소설은 이후 한국 농촌 계몽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상록수 정신을 후세에 전달하고자 상록탑을 건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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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열사 충혼탑
    오열사 충혼탑
    시설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사건연도
    1977
    주제
    독립운동기타

    고창군 부안면 장군봉에 위치한 오열사 충혼탑은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친 다섯명의 열사 (이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와 호남칠의장(고관순, 기삼연, 김준, 김수용, 이석용, 심남일, 문태수), 청산리 · 대전자대첩의 전공을 세운 장병들의 위국충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