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시설
(2,366)-
링크 연결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역사를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기억하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 건립
-
링크 연결
애국지사 김만득공 항일기공비
애국지사 김만득 선생의 항일운동을 널리 알리고 기념비 건립을 통해 애국애족의 교육장으로 활용
-
링크 연결
유관순기념관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갈전면(葛田面, 現 竝川面) 아우내(竝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편입하여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에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하였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과 김구응(金球應)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의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로 대표하는 성남면(城南面)·갈전면민들이고, 하나는 동면(東面)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와 갈전면의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이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며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하여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군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전 9시,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하여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유관순은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하였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내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과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유관순은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유관순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결국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경성(京城)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모교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링크 연결
유관순 열사 상(像)
3.1운동의 상징으로 전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 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2019.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였다. 일제에 항거한 유관순 열사의 공훈을 기리고 애국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자 기념상을 건립하였다.
-
링크 연결
경기인 호국영웅 명비
본 시설은 경기고등학교 졸업자 중 6·25 전쟁 대 참전 및 사망하신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동시에 예우 및 선양을 위한 기념비임.
-
링크 연결
중동고등학교 참전용사 명비
국가를 위해 희생 및 공헌하신 중동고등학교 6·25 참전용사의 호국보훈정신을 기리며, 그들의 애국과 헌신의 역사를 가슴 깊이 기억하고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한다는 의미를 담은 기념비임.
-
링크 연결
여수고등학교 6.25참전유공자 명비
이 명비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여수고등학교 출신 참전유공자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선배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배들에게 계승하고자 건립하였습니다.
-
링크 연결
6.25·월남전 흔적전시관
6.25·월남전 흔적전시관은 참전유공자와 유가족을 직접 찾아가 삶의 순간을 담은 일기, 편지, 사진, 전투 현장에서 지니던 물품 등 생생한 흔적을 수집·보존한 국내 최초 개인흔적 전시관임. 이는 단순한 유품의 나열이 아니라, 각 기록이 지닌 감정과 기억,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온전히 담아낸 '개인의 엯역사'가 모여 하나의 '국가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 자체를 보여줌. 본 전시관은 이와 같은 기록의 힘이 가진 교육적, 사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미래세대와 공유하고자 전시관을 건립함
-
링크 연결
주문진 순직경찰관 위령비
1981. 12.1. 21:30경 폭풍경보 발효 중 표류하는 주문진항 소속 대성호와 선원을 구하려고 강릉서 연안경비정 강원1호 승무자 경위 김진강 등 6명이 폭풍과 격량의 파도와 싸우다가 주문진항 300미터 남방해상에서 침몰하여 당시 강릉경찰서장 총경 홍응수의 발의에 따라 강릉경찰서 직원들과 지역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위령비를 건립
-
링크 연결
중랑구 호국보훈 기념공원
ㅇ 부지: 중랑구 배말공원(총 면적 19,887.9㎡, 6,016평) 내에 위치 - 전체 조성면적 약 900㎡(272.7평), 기념비 공간 약 328㎡(99.4평) ㅇ 주요내용 - 호국정원(주민 휴식공간) 조성 및 산책로 설치 등 - 중랑구의 6.25전쟁 및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명각비 설치(약 4,200명) <참전기념비> 수량: 10개비(가로 8m, 높이(가장 큰 3m, 가장 작은 1.5m), 좌대 3cm <의의비(2동) 및 표지석(1동)> - <표지석> "이 비는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중랑구 국가유공자들의 공훈을 선양하기 위하여 2026년 3월 중랑구민의 뜻을 모아 건립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중랑구의 오늘과 내일,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참전유공자와 가족들의 헌신 덕분입니다. 이에 중랑구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기념비를 통해 참전영웅의 숭고한 희생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중랑구민과 우리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리고자 합니다" [2026년 3월 중랑구청장 류 경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