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3일 고종황제 장례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한 원용은은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만세운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면천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태극기와 선전물을 제작하였으며, 서울에서 강선필(姜善弼)이 가져온 독립운동노래를 등사판에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 동문 밖 저수지 너머 골짜기에 면천초등학교 전교생이 집합하였다. 이때 높은 대에 올라 서울에서 본 만세운동의 광경을 말하며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이후 준비했던 태극기와 선전물을 꺼내어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자리에 모였던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면천보통학교를 지나 경찰주재소 앞까지 진출했다. 이에 일본 순사가 강력히 진압하여 원용은도 박창신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31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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