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康津)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성(李基性)·황호경(黃鎬京)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강진읍에서는 이에 앞서 3월 25일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기독교인 황호경·이기성 등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일제에게 탐지되어 주동자 12명이 체포되고, 삼엄한 감시가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배재학교(培材學校) 학생으로서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3월 31일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이미 3월 25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일경에게 탐지되어 은신하고 있는 이기성·황호경 등을 만나 서울의 정황을 알려주고,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상의하였다. 그들은 4월 2일 남성리(南城里) 이기성의 집에서 다시 만나 4월 4일의 강진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읍내 남포리(南浦里)교회와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려주는 한편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3백여매, 독립선언서 70여매, 독립가(獨立歌) 20여매를 등사하여 두었다. 4월 4일 오전 9시, 이기성의 집에서 독립만세 시위방법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준비된 유인물을 각기 분담하여 동성리(東城里) 장터로 운반하였으며, 거사 신호인 예배당의 정오(正午) 종소리가 울리고, 김후식(金厚植)이 군청 뒤 산마루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시위군중에게 유인물을 나누어주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1,0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이때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강진 보통학교 학생들도 교정을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세하여 장터를 행진하니, 시위군중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발포로 말미암아 맨손으로 일어난 시위는 중단되고 그는 주동자로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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