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법부 주사(主事)를 지내고,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그 해 11월의 만민공동회 때에는 간부로 적극 활동했으며, 12월말에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 당할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해서 국권을 빼앗아 가자, 도끼를 메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엎드려 을사조약을 파기하고 을사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리었다. 일본 경찰은 안병찬을 경무청에 체포했다가 70여일 만에야 석방하였다. 그 이후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총살사건이 일어나자,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자진하여 안중근의 변호를 담당해서 여순법정으로 갔으나 일제는 관선변호인만 인정하고 안병찬의 변호는 일제에 의하여 거절당하였다. 이에 「일본은 피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유린함으로써 피고에게 미리 사형을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통박하였다. 이해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이 매국노의 수괴 이완용(李完用)을 자상(刺傷)하고 일제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자진하여 변호를 담당해서 이완용은 매국역적이므로 이재명이 이완용을 공격한 것은 애국열성에서 나온 당연한 거사임을 주장하였다. 일제강점 후 1911년 9월에 일제가 신민회 회원을 검거할 때, 소위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의 혐의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이듬해 석방되자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바로 그 달에 조재건(趙在健) 함석은(咸錫殷) 오학수(吳學洙) 지중진(池仲振) 등 동지들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여 그 총재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한독립청년단을 지휘하다가 1919년 9월에 일제에게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병이 나서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다. 즉각 다시 망명하여 남만주의 관전현(寬甸縣)에서 1920년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는 남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할 필요를 절감하고, 김찬성(金燦聖)과 같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대표해서, 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대표 조병준(趙秉準) 김승만(金承萬), 독립단(獨立團) 대표 김승학(金承學) 등과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통합회의를 열어 각 독립운동단체의 수뇌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면서 통합할 것을 권유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2월 12일 동지들과 함께 관전현 대아하(大雅河)에 있는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있는 기원독립단 총재 박장호(朴長浩), 한족회(韓族會) 간부 김동삼(金東三), 안동원(安東源) 등을 역방하고 통합안을 협의한 바 전원의 찬동을 얻었다. 이에 관전현으로 돌아와서 1921년 2월에 향로구에 남만주 독립운동의 통일기관을 설치했는데, 이 기관이 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이었다. 대한광복군의 성립은 안병찬의 활동에 의거한 바가 매우 컸다. 1920년 4월 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평안북도독판부의 독판에 임명되어 평안북도독판부와 대한광복군을 긴밀하게 연계시키고, 5월에 김승학 이 탁(李鐸) 등과 함께 상해로 가려고 하다가 중 일합동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관전현지사(중국인)의 호의로 석방되자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협의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와 안병찬 일행이 합의한 결과 남만주의 교민통치기관은 대한광복군참리부(大韓光復軍參理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내무부의 직속기관으로 하고, 남 북 만주의 군사기관은 대한광복군사령부(大韓光復軍司令部)라 칭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의 직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9월에는 임시정부의 법무차장(法務次長)에 임명되고, 임시정부 법률기초위원회(法律起草委員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에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이르크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제1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상해로 돌아와서 국내 연락기관으로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결성하였다. 이 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얻어 돌아오다가 자금문제의 갈등으로 반대파 공산당원에게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