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생모로서 독립운동가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 국내 및 중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아들 김구가 1911년 7월 22일 비밀결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서울에 도독부(都督府)와 각 도에 총감(總監)을 두고 중국 동삼성(東三省)에 독립운동기지를 창설, 독립군 양성을 꾀하며 황해도 대표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징역 15년을 받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 아들을 면회하러 와서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위로하며 집 걱정은 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하루 2번씩 사식을 제공하는 등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김구가 1922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상해로 가서 때로는 조석이 어려워 중국사람이 버린 쓰레기통에서 배추잎을 주워 끼니를 이어오면서도, 생활비를 절약하여 저축한 돈과 생일축하금으로 단총 2자루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쓰도록 제공하였다. 상해에서 고난을 겪으며 독립운동을 뒷바라지 하다가 1925년 12월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돌아와서 생활비를 절약하여 아들 김구에게 송금하며 계속 독립운동하도록 지원 격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하여지자 1934년 3월 19일 손자인 김인(金仁 : 당시 18세)과 김신(金信 : 당시 13세)을 데리고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재령을 경유하여 상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후 장손인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中央軍官學校 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는 등 아들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다가 병을 얻어, 1940년 4월 26일 평생 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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