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후반 충남 예산(禮山)에서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 예산지국 기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경부터 1930년 3월경까지 예산읍내에서 성낙훈(成樂薰)이 경영하는 동아일보 예산지국 내에 ‘전기사(戰旗社)’ 예산지국을 두고 약 3회에 걸쳐 ‘전기’ 5부씩 송부 받아 판매, 교부하였다. ‘전기’는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여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조직된 일본공산당(日本共産黨)의 기관지였다. 이 무렵 충남농업학교(忠南農業學校) 동맹휴교 선동혐의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동년 9월 신간회(新幹會) 예산지회(禮山支會) 대표회원 후보가 되었다. 1931년 6월중 예산청년회(禮山靑年會) 농민부원으로 추천되었고, 동회에 회람문고가 설치되자 ‘전기’ 5부를 회원의 회람 목적으로 기증하였다. 동년 8월 29일 예산청년회가 개최한 토론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 일본 동경(東京)의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이 발행하는 흑색신문(黑色新聞)을 송부 받아 청년 대중에게 배부하였다. 성진호는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33년 5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1933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출옥 후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한 후유증으로 급성결핵에 걸려 1933년 8월 28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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