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寶城)군 문덕(文德)면 가천(可川)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서울에 올라와서 외숙의 집에서 공부하다가 14세 때에 왕이 친히 보이는 전시(殿試)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김옥균(金玉均)을 알게 되어 그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3년 4월에 일본의 호산(戶山)육군학교에 유학하여 이듬해 5월에 귀국해서 김옥균과 함께 사관학교를 설립하려다 수구파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김옥균·박영효(朴泳孝)·박영교(朴泳敎)·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서 신정부의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정령관(正領官)을 맡았으나, 청국의 군사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1885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고학으로 죠지 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암스트롱양과 결혼하여 미국에 귀화하였다. 죠지 워싱턴대학에서는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세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94년 7월에 본국에서 갑오경장 추진내각이 수립되어 갑신정변 때의 정변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고, 옛 동지인 박영효가 1895년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귀국과 외부협판직의 담당을 요청하자 조국의 개화독립에 봉사하기 위하여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정세를 관찰해 보고는 입각하는 것보다 국민계몽운동을 하는 것이 더 필요함을 절감하고 입각을 거절한 다음 개화파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① 국문전용, ② 국문 띄어쓰기, ③ 쉬운 국어쓰기의 방법으로 발행되어 시대에 맞추어 국민의 독립사상 형성과 개명 및 진보에 큰 공헌을 했으며,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의 효시가 되어 그 후의 한국 신문과 언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였다. 독립협회는 그 첫 사업으로 종래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한국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獨立門)을 세웠으며, 종래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고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의 다음 사업으로 토론회(討論會)를 조직하여 매주에 한 번씩 서울 시민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과 개혁에 대한 토론을 시키어 국민의 자주독립 사상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하였다. 토론회는 모두 34회 개최되어 국민의 독립사상을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당시 제정 러시아가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오고 친로수구파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여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조직해서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궐기대회인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절영도 조차 반대 및 러시아의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 결과 결국 러시아의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과 한·러은행은 철수하고 절영도 조차 요구도 분쇄하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도를 입헌제도로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입법을 하고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을 가져야 열강의 침략을 막는 정치제도가 만들어지고 국민의 자유민권도 신장된다고 계몽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국민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파들은 서재필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어 결국 수구파정부와 러시아 및 미국이 결탁하여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추방 후 개업했던 병원을 닫아 버리고 다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회의(在美韓人全 會議)」에서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外交通信部)를 설치하여 각국에 대한 한국독립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4일에는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를 결의하고 국제연맹과 미국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毆美委員部)를 설치하자 그 위원장을 맡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에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미국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등 눈부신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는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그 주필로서 한국의 독립을 전세계에 역설하고 선전하였다. 『한국평론』지는 1921년 12월에 재정난으로 중단될 때까지 매월 발행되어 한국의 주장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으며 1922년 1월에는 미국 대통령 하딩을 직접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5년에 범태평양회의(凡太平洋會議)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회의에서 감동적 연설과 활동을 하여 대리회장으로 선출되자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였다. 그는 3·1운동 후 그 때까지의 독립운동의 경비로 자기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팔아서 사재(私財) 7만 6천불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넣고, 1926년에는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일시 귀국하여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에 선임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병석에서 조국의 불운한 명운을 통탄하다가 1951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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