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진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휘하에서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1906년 태인에서 의거를 추진하였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나 순창에서 패배 후 체포되었다. 1914년 독립의군부 서기관으로 임명되었고,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명
-
성별
남성
본적지
전라북도 고창
생몰 연월일
1875-11-24 ~ 1952-10-02
운동계열
의병
포상
애국장 (1990)
활동정보
고예진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항일 투쟁의 명문인 장흥(長興) 고씨로서 임진왜란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예이다. 그의 일문은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의 휘하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휘하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고예진은 그의 형 고석진(高石鎭) 고용진(高龍鎭)과 함께 면암의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은 오랫동안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으나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고예진과 고석진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 청년들이 정산(定山)에서 면암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한편 면암은 의거의 거점을 물색하던 중 문하생의 추천으로 알게 된 임병찬(林炳瓚)의 권유로 태인(泰仁)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4월 13일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태인 일대의 유림인사를 규합할 때 함께 거의하였다. 여기에 그의 형 고용진이 포수 3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여 기세를 올려 주었다. 그 이후 고예진은 면암 휘하에서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순창 귀암사(龜巖寺)에서 포진(布陣)하고 적과 접전하다가 크게 패하고 체포되어 전주옥(全州獄)에 투옥되었다가 12월 27일 석방되었다. 1914년에는 황제의 밀명에 의하여 독립의군부 서기관(獨立義軍府書記官)으로 임명되어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137인 중의 1인으로 서명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