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함나는 1914년 1월 20일 차이나호를 이용하여 하와이에 왔다. 그녀는 민의식(閔義植)의 사진신부였던 것이다. 3.1운동의 소식이 하와이에 전해졌다. 하와이 각 지방 여성들은 1919년 3월 15일 「부인공동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로 뜻을 모았다. 4월 1일 하와이의 모든 여성단체 대표들이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했다. 민함나는 여기에 몸담으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대한부인구제회는 교민단파와 동지회파로 분열되었다. 1930년 12월 22일 개최될 동지식산주식회의 주주총회에 참석할 대표 선정을 두고 몸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민함나는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에 몸담으며 이승만을 지지했다. 1938년 대한부인구제회 연례대표회에서 와히아와 대표, 1939년 연례대표회에서 부회장 겸 힐로 지방대표가 뽑혔다. 1941년 3월 3일 대한인부인구제회 제19차 대표회에서 중앙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미주지역의 한인들의 역량을 결집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국민회 등 9개 단체 15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민함나는 심영신과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 자격으로 회의장에 갔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미주지역 독립운동 총괄 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는 하와이에 두었다. 위원장 이원순, 부위원장 안원규 등이 선임되었고, 민함나는 심영신과 함께 의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42년 2월 하와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독립금 예약 수봉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녀는 호놀룰루의 누아누우에서 릴리하까지 독립금 수봉 업무를 맡았다.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사이에 갈등이 커져갔다. 급기야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서 민함나는 기로에 놓였다. 그녀는 그동안 유지해오던 ‘이승만 지지’를 철회했다. 1944년 5월까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외교위원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1945년 3월 10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 동포 구제 목적으로 조직된 ‘전후조선구제위원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녀는 하와이 도착이후 1945년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1952년 9월 4일 별세하였으며, 누아누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본 보훈문화종합포털은 통합검색, 이용자 행동 분석 등을 통해
보다 나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쿠키를 사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으며,
통계적 분석 목적 외의 용도로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
거절 시 서비스 이용이 제한 될 수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