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7월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현 휘문중고등학교)을 졸업하였다. 같은 해 8월 우리나라를 일본에 강점 당하자 다음해(1911)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이미 그곳에 와서 자리잡고 있던 예관(晲觀) 신규식(申圭植:1879~1922)이 경영하는 상해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던 신규식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색하였으며, 여기서 중국어와 영어 등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언어에 장애가 없도록 노력하였다.
단기학원인 이 학원을 2년만에 졸업하고, 1912년 9월에 다시 남양학당(南洋學堂)에 입학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미 동년 2월에는 학생의 신분이었으나 신규식이 조직한 독립사상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간부와 한중(韓中)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도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신규식은 이 회의 이사장으로 한중공동의 항일구국운동전선을 구성할 계획으로 있었다.
그는 5년 만인 1917년 7월 남양학당을 졸업하고 중국 관립 교통부 상해 체신학교(遞信學校)에 들어가 1918년 12월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규식의 비서로서 연락사무를 보좌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민주공화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된 뒤 그는 동년 7월 임시정부 법무총장직을 맡고 있던 신규식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그는 동시에 정풍문학원(正風文學院)에 입학하여 중국고문학 등을 연구하였으며, 다음해 7월에 이 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는 192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이며 외무, 법무총장인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로서 광동(廣東)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공식 예방하고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중국 호법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후 1923년 10월부터 1936년 4월까지 13년여 동안 그는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을 역임한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서 재정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아 정부의 경상비 조달 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이시기에 중국 국민정부 교통부 전보국(電報局)에 종사하면서 임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업무를 담당 처리하는 일방 1924년 1월에는 상해 교민단 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 학무위원이 되어 교포의 교육자치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교포들에게 교육비 납부의 정당성을 설득하면서 교포의 교육자치사업에 진력한 바도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소위 일황(日皇) 생일 경축식이 거행되자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니 일본 영사관원들은 당황하여 국제 공법을 무시하고 야간과 새벽을 이용하여 사복경찰과 형사를 풀어 프랑스조계(租界)를 수색, 김 구(金九) 등 임시정부 요인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때 그는 중국 친우 은여려(殷汝驪)에게 도움을 청하여 임정요인 김 구 외에 이동녕(李東寧)·엄항섭(嚴恒燮)·안공근(安恭根) 등을 절강성 가흥(嘉興)에 사는 중국인 저보성(褚輔成, 전 중국 중의원 의장) 댁에 무사히 피신시키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와 체포의 위협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 등을 다시 항주(杭州)지역으로 각기 안전하게 피신케 주선하여 임정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1936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蔣介石) 시종실(侍從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종사하였으며, 이어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소장급)으로 근무하던 중 1938년 11월부터 장개석장군의 시종실이 이동함에 따라 곤명(昆明)·중경(重慶) 등지로 전전 근무하였다. 그 뒤 1939년 5월에 일단 사임하고 임정의 김 구 주석을 보필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 구의 판공실장(辦公室長) 겸 외무차장(外務次長)에 기용되었으며 임시 의정원의 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건국이념에 따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설립되자 동당의 선전부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상해판 독립신문을 새로이 복간 발행하여 중경판 독립신문 시대를 열어 놓았다.
1942년 12월에는 김 구·조성환 등과 함께 미령(美領)을 대표하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1944년 3월에는 주석판공실(主席辦公室)의 비서로 근무하다가 동년 7월에는 주임(主任)으로 승진되어 광복시까지 김 구 주석을 보필하였다.
저서로는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와 신규식의 한국혼(韓國魂)을 중국어로 번역 소개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