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10살 때부터 1899년 19살 때까지 고향인 영흥에서 사립소학교와 사립중학교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습득하였으며, 20대 초반인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 동안 한국사와 중국사를 공부하여 사학(史學)에 입문하였다. 이어 1906년부터 3년간 영흥군내 흥명학교에서, 1910년에는 함흥(咸興)의 영생중학교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동휘(李東輝)를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된 1911년 1월 신민회원이자 이동휘의 사위인 정창빈과 더불어 북간도(北間島)로 망명을 결행하였다. 북간도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 자리를 잡은 그는 이동휘·김 립(金立) 등과 함께 소영자(현재는 延吉市로 편입)의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육성하는 한편, 국사와 국어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朝鮮歷史)』·『국어(國語)』·『조선지리(朝鮮地理)』 등 한국사와 한국어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여 간도 전역에 보급하는 등 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후 1915년, 중국 관헌의 탄압을 피해 다니던 이동휘 등과 함께 왕청현(汪淸縣) 하마탕으로 이주하여 국사와 국어 연구에 전념하던 중, 이듬해인 1916년 음력 10월 용정(龍井)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대가 이동휘를 체포하기 위해 하마탕의 한인촌을 급습할 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인천(仁川)에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한 그는 고향인 영흥으로 귀향하였으나 금고(禁錮)로 말미암아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재차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인 화부의 도움으로 러시아 상선에 은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고, 8월에 다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북간도 대표 의원으로 부임한 그는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펼치는 한편, 이듬해 1월부터 5월에 걸쳐 '뒤바보'와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북간도(北墾島) 그 과서와 현재」·「아령실기(俄領實記)」·「金알렉산드라小傳」·「의병전(義兵傳)」 등 주목할 만한 민족운동 관련 저술을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발표하였으며, 김두봉(金枓奉)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국문법 등 연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유예균(劉禮均)과 함께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국민회(國民會)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동년 4월에는 이동휘가 조직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 가입하여 당 기관지인 『자유종(自由鐘)』의 주필이 되어 필봉을 휘두르는 한편, 5월에는 유동열(柳東說)·이 탁(李鐸)과 함께 임정간도특파원(臨政間島特派員)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경 치타에 위치한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 임시수도 웨르흐네우진스크(현 울란바토르)에 파견되어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당의 특사인 한형권(韓馨權)·박진순(朴鎭淳)·박 애(朴愛) 등과 합류하여 그들과 함께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에 한인부(韓人部)를 조직하고 장도정(張道政) 등과 더불어 5인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여 자유시(自由市)로 집결하는 남북만주 독립군부대의 군(軍)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1921년 4월 사할린의용대가 주둔하고 있는 바사노프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제2차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동 위원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군권 수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동년 6월 전개된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붙잡혀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臨時高麗軍事革命法院)에서 소위 혁명방해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겪었다. 1921년 11월 15일 코민테른 감사위원회의 결정으로 오명을 씻고 출옥한 그는 치타로 가서 한글잡지인 『새사람』의 주필이 되었으나, 이동휘가 꼬르뷰로(高麗局)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이동휘를 따라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전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주요 도시의 각급 학교에서 민족교육과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국학(國學) 연구 및 교과서 편찬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국민학교용 역사교과서, 1924년에는 원동(遠東) 행정당국의 위임으로 국민학교용 우리말 독본인 『붉은 아이』를 각각 편찬하였고, 1924년 1월부터 6월까지 블라디보스톡 제8호 중학교에서, 1926년 8월부터 1930년 3월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노동학원에서 『대한문전(大韓文典)』 등 한국어를 교수하였다. 1930년 중학교용 교과서를 편찬한 그는 그 해 5월부터 1933년 4월까지 하바로프스크대학에서 모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1931년에는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을 저술·간행하였다. 그리고 1933년 봄부터 1935년까지 극동 스파스크 즈비야기노 소재의 국민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북프로호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간행하는 등 1921~1937년까지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국어국문학과 한국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과 저술을 남겼다. 특히 이 시기 『조선역사』1·2권과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 등 대표적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937년 소련내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공화국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그는 광복 후 북한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도 거절한 채 생을 마감할 때까지 22년 동안 크즐오르다에서 모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조선문법(朝鮮文法)』·『조선역사(朝鮮歷史)』 등을 집필하여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연구·보급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