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뒤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에 수학하던 중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1913년 곧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상해에는 예관 신규식(申圭植)이 주재하여 조직된 동제사(同濟社)가 있었는데 그는 신규식의 총애를 받고 이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상해 대한민국청년단(大韓民國靑年團)에 가입, 재무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의정원이 개원되자 그는 이동녕 이시영 여운형 등과 같이 제2차 의정원회의에 69명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어 1929년까지 활약하였다. 이해 5월 2일 임시정부 재원(財源)염출방침에 대한 각 지방의원의 의견을 들은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 인두세(人頭稅)의 모집, 내외에 공채모집 등의 방법을 가결하였으며,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 각지방의 우선 구급의연금 모집위원 3명씩을 선거하여 업무 수행을 하게 할 때 그는 여운형 박희선(朴熙善)과 함께 경기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출발된 대한적십자회 조직에 가담하여 그는 30여명 가량의 뜻있는 인사를 모집하여 조직에 참여시켰다. 또한 그는 1923년 김상옥(金相玉)의 귀국을 주선, 종로경찰서에 투탄하는 의열활동을 뒷받침하였다. 같은 해 그는 상해 교민단의 서구 위원(西區委員)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의 임무 수행을 충실히 전개하였다.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의 경기도 의원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구국에 필요한 안건을 통과시키는데 전력투구하였다. 이듬해 의정원 의원의 보궐선거에서도 당선된 그는 임시정부의 일을 계속하였다.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있은 뒤 일경의 수색망을 피하여 임시정부를 쫓아 항주(杭州)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그는 구국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움직임을 위하여 임정 요인을 호위 지원하면서 독립투쟁을 유일한 생활철학으로 하여 그 진로를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932년 고생 끝에 병을 얻어 이국땅 항주(杭州)의 자취방에서 4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완전 독립할 때까지는 어떠한 난관이 닥친다 해도 이를 극복, 합심하여 계속적인 투쟁이 있을 뿐이로다. 독립운동에는 가시밭길 같은 험난한 장애가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니 이 또한 인내와 사명감으로 이기고 새로운 보람을 찾아 이 길로 매진하길 빌 뿐이로다."하고 간곡한 유언을 남긴 뒤 운명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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