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배재고보(培材高普) 5학년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天道敎)가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민족세력을 결집한 대대적인 6·10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참여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학생층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강경탄압으로 만세운동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성경학교 기숙사에서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대표자들과 회합을 갖은 그는 제2의 6·10만세운동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격문과 선전문을 작성·인쇄하는 책임을 맡아 실천하던 그는 6월 18일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동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 후 1932년 황해도 해주(海州)의 구세병원 의사로 기반을 잡은 그는 1938년 감리교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윤치호(尹致昊)·정춘수(鄭春洙) 등 친일 기독교인들이 한국감리교회를 일본메소디스트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행각을 벌이자, 한국감리교회의 일본교회 예속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1년 3월 정춘수 등이 국민총력(國民總力)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명의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혁신단(日本基督敎朝鮮革新團)을 창립하려 하자, 1942년 10월 해주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여 이규갑(李奎甲)·조신일(趙信一) 등과 함께 정춘수의 불신임안을 결의하였으며, 1943년 10월 일제의 비호로 정춘수가 다시 교권을 장악할 때까지 종교투쟁을 통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