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파인 힐(Pine Hill) 신학교를 졸업했다. 1897년 달하우지 의과대학(Dalhousie Medical College)을 졸업하여 의사자격증을 받았다. 1898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해에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1898년 9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899년 2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1901년 5월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했다. 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1908년 11월 한명의 일본군 병사가 한국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것에 격분하여 그를 구타하고 그의 상관인 덕원군 헌병분견소장 고바야시(小林善八郞)로부터 사과를 받아냈다. 1909년 봄, 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에 내려와서 학교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동휘가 찾아왔다.
이동휘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교직(敎職)을 부탁했다. 그는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1년 후에는 이동휘를 조사(助事)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동휘가 1914년 가을경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외로 망명을 꾀하자 국외 망명을 도와주었다.
3.1운동 때는 1919년 3월 7일 성진지역에서 서울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 3월 9일 주일에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여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3월 10일 성진 만세시위 때 캐나다장로회에서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관공서·경찰서가 있는 시내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본 군경과 소방대가 출동하여 한국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총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날 아침 일찍 성진경찰서에서 동료 선교사 로스(Mr. Ross)와 함께 호출이 있었으나, 밀려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저녁 식사 후에야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담임하던 성진교회 모든 장로들과 많은 교인들이 체포 투옥되어 3월 16일 주일 예배에는 첨석자가 적었다. 그날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한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치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에 “성진 소요의 주모자는 야소교 선교사 영국인 「크레-손」인데 백성들은 화근을 없애려고 영국인을 죽인다고 떠들며 분개한다더라”고 허위로 보도하였다. 당시 투옥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고 몇 년간씩 징역 선고를 받고 서울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때때로 이들을 면회하고, 교회 여신도들을 교대로 보내어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게 했다. 1935년 정년퇴임 후 귀국하여 토론토(Toronto)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98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1. 영국인 선교사의 일본 헌병 빈전심장(濱田甚藏) 치상(致傷)사건 보고 건(원산이사청 이사관:1908. 11. 21), (통감부문서, 국사편찬위원회, 1998) 제1권 313~314면 2.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관한 건(제14보)(1919. 3. 13) 3.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4보)(1919. 3. 23) 4.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15) 5. 동아일보(東亞日報)(1934. 5. 31, 1937. 8. 9) 6. 간도독립운동소사(間島獨立運動小史)(홍상표, 1966) 11면 7. Episode on a Long, Long Trail(R. Grierson, 1957) 8. 간도사신론(間島史新論)(서굉일 등, 1993) 상권 90~1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