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춘삼은 황해도 해주군 청운방에서 태어나 군대 해산 후 대일 항쟁에 전념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그는 박기섭의 의병대와 함께 평산군 이서와 해주군 사이에서 활약하였고, 1913년 일본 헌병의 급습으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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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남성
본적지
황해도 해주
생몰 연월일
1858-05-03 ~ 1913-05-06
운동계열
의병
포상
애국장 (1990)
활동정보
강춘삼은 황해도 해주군 청운방 사리 마치동(海州郡 淸雲坊 馬馳洞)사람으로서 군대 강제 해산 이후 거의(擧義)하여 대일 항쟁에 전념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그가 활약하던 황해도 일대의 의병의 수는 당시 일경의 집계에 의하면 6~7백 명에 달하였으며, 다시 여러 개의 부대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주력 의병대의 의병장은 박기섭(朴箕燮)이었다. 박기섭은 본래 영남사람으로서 당시 목천(木川) 부사로 있었는데 황해도 유림의 인사들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는 군대 해산 후, 항일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뻗어 가고 있을 때, 전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명범석(明範錫) 신종균(申宗均)을 시켜서 왕의 밀지를 전달하여 은근히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앙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에게 황해도 유림 인사들이 그들의 의병 거사의 모든 것을 맡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뜻을 모은 참모진들이 평산 도평산(桃坪山)에 의진을 정한 후 격문을 지방에 돌리자, 여기에 호응하는 의사들이 4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박기섭의 의진이 형성되자, 기타의 의병 부대로서 강춘삼의 의진을 비롯하여, 신경칠(辛景七)·이야천(李野天)·김상현(金相鉉)·한경옥(韓京玉)·허덕천(許德天)·장명단(張明端) 등의 의진이 형성되었다. 특히 강춘삼의 의병 부대는 박기섭 의병 부대의 중대장 심노술(沈魯述)이 거느리는 의병들과 더불어 평산군 이서(以西)로부터 해주군 사이에 걸쳐 크게 활약하여 전과를 거두었고, 장명단 의병 부대는 해주군 서부 지방에서 신출귀몰하는 게릴라 작전으로 끝까지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 이후 강춘삼의 활약에 대한 문헌 기록은 없지만 1913년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즉 1910년에 해주 근처 여묵 원야(餘默 原野)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으며, 그해 가을 해주 동촌 청단시(東村 靑丹市) 쟈라기 벌판 전투에서 대접전을 벌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고 한다. 1913년 5월 일본 헌병의 불의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어 천단시 학곡(學谷)에서 총살되어 향년 55세로 순국하였다. 그 후 향리에서는 그의 사당과 기념비를 건립하고 추모제를 지내었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