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창성(昌城)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향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초기 「임정」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기자로 활약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다가 1923년 3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7월 14일에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會計檢査院) 검사관(檢査官)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의열단원(義烈團員)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의회정치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 3월 13일에는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독립운동자금 공급 문제와 위임통치 문제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승만(李承晩) 초대 임시대통령의 탄핵안을 상정 가결케 함으로써 재임 6년만에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면직되고 이동녕에 이어 박은식(朴殷植)이 6개월간 제2대 임시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25년에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參事) 겸 경무국장(警務局長) 서리에 취임하여 임정의 강화와 통일정부 유지에 진력하는 한편 노병회(勞兵會)의 이사(理事)로도 활약하였다. 1926년에는 나창헌(羅昌憲) 고준택(高俊澤) 등 동지와 협의하고 중화(中貨) 5,000원(元)을 조달 제공하여 임시정부의 호위 및 강화를 기약하였으며, 밀정이나 일제의 앞잡이 등을 숙청 정리하고 난동 분자의 엄중 단속, 일제의 주요 시설 파괴, 요인 제거 등을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고 그 산하 단체로 정위단(正衛團)을 두어 그 총무 겸 심판원(審判員)으로 20대의 열기를 쏟았다. 이에 가담한 청년 지사들은 40여 명에 달하였는데 주요 인사를 보면 전기한·나창헌·고준택 외에 최병선(崔炳善)·김광산(金光山)·문일평(文一平)·이성구(李成九)·장진원(張鎭元)·이일태(李逸泰)·김석룡(金錫龍)·한성도(韓聖島)·이운한(李雲漢)·이지만(李枝萬)·강파(姜波)·이지찬(李枝贊)·이지선(李枝善)·김창근(金昌根)·김수산(金水山)·공득평(孔得平)·이경산(李景山)·박지웅(朴志雄)·강병학(姜秉鶴)·신송식(申松植)·박창세(朴昌世)·이덕용(李德用)·이덕삼(李德三)·이응삼(李應三)·문선재(文善才)·최용건(崔鏞健) 등 30여 명을 손꼽을 수 있다. 병인의용대의 임정보호운동으로 상해의 한국동포사회의 치안이 훨씬 개선 안정되었으며 일제의 앞잡이들은 거의 근절되어 갔으므로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제고되고 안정된 반석 위에 놓여질 수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임시정부는 제3차의 개헌을 통해 지도체제를 국무위원제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병인의용대원 최병선 장진원(영환, 英煥)·김광산 등과 같이 상해 홍구 해녕로(虹口 海寧路)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영사관 내산판사처(內山辦事處)를 기습 공격하여 내산(內山)과 그 주구인 최동윤(崔東允)을 격살하였다. 내산판사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변절시키거나 귀순케 하는 전담반이었다. 기습으로 최병선이 부상당하였고 동지 장진원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대원 김광산 김창근 이성구 등과 함께 다시 출동하여 작전을 폈으나 발각되므로 수류탄을 던져 일본경찰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전원이 무사 귀대하였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금 대원동지 이덕삼 등을 시켜 일본의 고등계 형사 판사처(辦事處)를 야습하여 1명의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927년에는 동지 김창근 이성구와 같이 이지선이 제조한 시한 폭탄을 들고 일본영사관 창고를 대파, 타격을 주고 1명의 경찰에게 중상을 입힌 뒤 2명의 밀정을 총살하였다. 1928년 그는 강소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동년 7월에는 한인청년동맹회(韓人靑年同盟會)의 조사부원을 지냈다. 1929년에는 민족주의자 안창호(安昌浩)·이동녕·김구(金九)·조소앙·이시영(李始榮)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하였다. 이 해 8월 25일 병인의용대 명의로 가로인(假露人) 숙청호소문을 가두에 게시하였는데 이는 유일당 운동의 성과가 기대 이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에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2년 뒤인 1932년에 상해 동남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강소성 정부 민정청(民政廳)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어 일을 맡아보았다. 1934년에는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고 한국독립당 중앙이사 겸 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한국독립당, 의열단(義烈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이른바 5당 통합을 성취시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 그 중앙위원 겸 조사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이청천(李靑天)·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 悅)·이광제(李光濟)·박창세(朴昌世)·양기탁(梁起鐸)·현익철(玄益哲)·김학규(金學奎)·이운한(李雲漢)과 중앙상무위원으로는 이청천·최동오 외에 박창세·이광제와 함께 그도 선임되었다. 이들은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재만조선혁명당 등의 순 민족주의적 정수의 혁명자로서 조직된 단체임을 내외에 선전하였다. 1935년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2년 뒤에는 양기탁·유동열·이청천·현익철·최동오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은 중·일전쟁의 악화로 수난이 겹친 때였다. 임정은 1937년 진강을 떠나 장사(長沙)로 오는 중 12월 13일 남경(南京)이 일본에 함락되고 북경(北京)에 일제의 괴뢰 중국정부(행정원장 왕극민, 王克敏)가 수립되었고, 24일에는 항주(杭州)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장사에서 임시판공처를 차린 임정에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이것이 장사사변(長沙事變)이다. 3당통합문제에 대하여 장사의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南木廳)에서 대표가 모여 논의하는 자리에 이운한이 김구·현익철·유동열·이청천 등을 저격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중 현익철은 사망하고 김구 등은 소생하였다. 이의 연루자로 그도 이운한·박창세 등과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와 박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 도주하였다. 이 사건의 원인을 김구의 「백범일지」에서는 이운한이 김구가 남경에 있을 때 상해에 특무공작을 위해 경비를 조달한 일이 있다 했고, 일제 보고에는 자금분배와 감정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석방된 후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審査課長)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에는 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신영삼(申榮三)·신기언(申基彦)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중국군사위원회 대립(戴笠)장군이 한국인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인원을 초모하게 되면 중국군의 후방부대로 편성하여 훈련시킬 뿐 아니라 무장을 도와 참전케 해 준다는 사실을 이연호로부터 보고 받자 그는 전방인원 모집 책임자로 선정되어 중국군사위원회 서안(西安)주재 한국내 연락처장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그는 임정 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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