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초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밀파된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이 그에게 3.1독립운동에 대한 밀지(密旨)를 전달하자 그는 거사책임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운동자금까지도 부담하였다. 이에 창성군의 거사일을 4월 1일로 정하여 2천여 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인해 그는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동 2일 밤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만주의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및 안동현(安東縣) 등지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판본(坂本) 고문 등 일제의 독립운동자 토벌대가 만주에 오자 관전현에서 이를 습격하고 창성헌병대의 헌병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이해 말에는 임시정부의 평안북도 조사원이 되어 임시정부의 대국내(對國內) 자료 조사 수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 1호에 의해 임시정부의 지하 조직망으로서 연락기관인 동시에 재정 조달 정령(政令)의 국내집행을 담당하는 임시정부의 국내지방 행정기관인 연통제(聯通制)가 조직되자 1920년 1월 12일 창성군의 군감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에 그는 창성읍에서 압록강을 건너 90리 거리에 있는 관전현 향로구에 창성군 임시군청을 개설하고 집무를 개시하는 일방 군내에 사람을 밀파하여 하부기구를 편성하였다. 약 2년 동안 창성군 임시군청의 독립활동이 지속되었으나 창성출신 이영익의 밀고로 인하여 군내 지하 독립투쟁을 하던 3백여 명이 피검되는 등 일대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그는 피신하여 북만(北滿)으로 이주하였으며, 북만의 한교회장(韓僑會長)이 되었다. 그후에도 그는 동녕(東寧)·목릉(穆稜)·밀산(密山) 등지에서 무장단체와 협동하여 국내 일경주재소 습격 등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