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남 대동(大同) 사람이다. 1919년 2월 중 곽권응 등 4명은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고 많은 대중을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의 6개의 장로파 교회와 연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이 운집하는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하는 관후리(館後里)의 숭덕학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는 서울에서 인쇄된 것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거사 일인 3월 1일, 숭덕학교에서 거행된 고종의 봉도식이 끝난 후, 김선두(金善斗)의 사회로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규찬(姜奎燦)이 독립정신에 관하여 연설을 하였다. 독립선포식이 끝나자 김창빈 등은 운집한 1,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수백 개의 태극기를 배포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만세운동 직후, 그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홍석운(洪錫雲)·김송혁(金松赫) 등과 평양에서 의용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 평양교통국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0월, 김석황(金錫璜)이 독립신문 제작에 필요한 비용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을 때, 그와 함께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의용단의 조직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후 안창호(安昌浩)의 소개로 192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흥사단원으로 활약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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