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희는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항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7년 이인영 의병장과 함께 관동창의진의 부장으로 활동하며 의병진을 결집하였으나, 1909년 일본군에 붙잡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그의 공훈은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되었다.
이명
姜善集
성별
남성
본적지
경기도 가평
생몰 연월일
1868-11-11 ~ 1909-11-30
운동계열
의병
포상
독립장 (1996)
활동정보
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갔다. 나아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1907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거의했던 의병진과 함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참여계층도 유림·농민·포수·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와 자결 순국함으로써 이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는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기에 강윤희는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김동필(金東弼)·경현수(慶賢洙) 등과 함께 조약에 협조한 을사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며, 각국의 공사들에게 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기회를 모색하다가 1907년 10월 이인영(李麟榮) 의병장이 결성한 관동창의진(關東倡義陣)의 부장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진을 결성한 이인영 의병장은 종래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의병진을 결집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의 의병진에 격문을 띄워 11월을 기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어 전국의 대표적인 의병진을 묶어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다. 마침내 군사장 허위(許蔿)가 이끄는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여 서울탈환을 위한 격전을 벌였으나 후속부대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함으로써 후퇴하고 말았다. 그후 이인영 의병장이 붙잡혀 순국하자 그는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여 강원도 화천군(華川郡), 양구군(楊口郡) 등지에서 부일배를 처단하고 일군과 교전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9년 5월 일군에 붙잡혀 경성지방재판소 춘천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