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19년 9월 진주(晋州) 광림학교(光林學校) 교사로 재직 중, 홍수석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혈성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주로 군자금 모집활동과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박만선(朴萬善) 등과 함께 오재영(吳哉泳)·김두현(金斗鉉)으로부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경고문을 배부받아 각처에 배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선전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한편 혈성단은 이 무렵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등과도 연결되어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국내 독립운동계는 1919년 9월 상해의 임시정부와 노령(露領)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하나로 합쳐 통합임시정부를 성립하게 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의 독립운동단체들은 3·1운동 때처럼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서로 연대하면서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이에 강우석을 비롯한 혈성단에서도 이와 같은 '제2회 만세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사전 발각됨으로써 1919년 11월 초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21년 1월 27일에 다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2년부터 동아일보 하동지국(河東支局)에서 일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어 전국 각처에 지회가 조직될 때, 그는 마산지회(馬山支會) 창립에 큰 힘을 쏟아 1927년 12월 29일 세칙제정위원(細則制定委員)으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