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소년시절에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한학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고국을 떠나 1910년 경술국치를 맞게 되자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건너갔으며 다시 길림·시베리아·연해주 등지를 편답(遍踏)하고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만주·노령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가하여 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할 계획을 품고 폭탄을 구입하여 허형(許炯)과 같이 원산을 거쳐 동년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안국동 김종호(金鍾鎬) 집에서 숙식하면서 동지 허형(許炯)으로 하여금 신임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사진과 부임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주읍 최준(崔浚)에게 보내는 공한을 허형(許炯)에게 건네준 후 남대문 정거장에 나가 재등실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앞 십여보 지점에서 폭발하였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은 인해(人海)를 이루었던 군중들과 관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한 개의 파견이 재등이 탄 마차 후면에 맞아 재등의 혁대를 스쳤을 뿐 정무총감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은 경미한 부상만을 입고 만철이사(滿鐵理事) 구보(久保)와 미국 뉴욕시장의 딸 허리슨 부인 등 37명의 부상자를 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중 일경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만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여 9월 11일에 절명하였고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 귤(橘) 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로 들어가 동년 11월 1일에 사망하고 산구간남(山口諫男) 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어 팔을 절단하였다. 이 거사는 "한일합방은 한국민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세계 여론을 기만하던 일제의 흉계를 폭로, 한국민의 정기를 표현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케 하였다.
일경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거사 장소를 빠져나왔다. 거사장소를 빠져나온 후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허형(許炯)을 만나 재거사를 계획하면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가회동 장익규(張翊奎) 집과 간호부 탁명숙(卓明淑)의 주선으로 사직동 임승화(林承華) 집 등을 전전하다가 동년 9월 17일 누하동에서 일제의 주구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斷頭台上) 유재춘풍(猶在春風) 유신무국(有身無國) 기무감상(豈無感想)"이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하니 향년 65세였다. 그는 한편으로 의열투쟁 뿐만 아니라 문화계몽사업에도 힘을 써 6개소의 학교와 3개소의 교회 및 1개소의 노인단(老人團), 민회(民會) 2개소를 조직 운영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