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장남으로 1920년 황해도 해주에서 상해로 건너갔다. 1936년 남경에서 한국국민당 예비훈련소 감독관으로 군사훈련을 독려하였고, 1937년 상해에서 기관지 「전고」를 창간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한국국민당 재건 및 일제의 주요기관 폭파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0년 중경에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으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명
金東山
성별
남성
본적지
황해도 벽성
생몰 연월일
1918-11-12 ~ 1945-03-29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
애국장 (1990)
활동정보
황해도 해주(海州) 사람이다.
김구(金九)의 장남으로 1920년 4살 때 조모 곽낙원(郭樂園)을 따라 상해로 건너갔다.
1936년 4월 남경(南京)에 설치된 한국국민당 예비훈련소에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군사훈련을 독려하였다. 1937년 9월에는 상해에 돌아와 한국국민당 청년단 상해지구 기관지로서 「전고(戰鼓)」를 창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3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임시정부의 명에 의하여 다시 상해로 돌아와 한국국민당 재건과 일제의 주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계획 등을 추진하였으며, 일본 전함(戰艦) 출운(出雲)의 폭파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일경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1939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 중(韓 中) 유대강화 및 첩보활동에 참가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重慶)에서 「청년호성(靑年呼聲)」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신병으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