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준은 서울 인문중등학원(人文中等學院)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에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옹동면(瓮東面) 비봉리(飛鳳里)에 갔다. 자택에서 잡지의 기사를 보고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시정책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특히 그 기사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식민지 인도에 대해 기만적인 정책을 취한 내용에 크게 공감하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민족의 장래도 이와 동일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1943년 11월 4일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민병섭(閔丙燮)으로부터 정읍 지방에서의 벼 공출 할당량이 전년에 비해 3배로 강화되어 농민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같은 달 9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강진면(江津面) 문방리(文方里)의 장인 앞으로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을 보면, 일제의 강제공출이나 지원병제도 등을 비판하면서 “놈들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는 실로 비참한 일”이라고 묘사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일시적 곤란이 아니라 이 전쟁이 끝나도 영원히 오랫동안 곤란이 계속될 것인데 실로 생각해보면 비참한 기분”이라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11월 29일 장인이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아 읽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2일 강영준이 “시국에 관하여 인심을 어지럽히는 사항을 유포”했다는 이유로 체포했던 것이다. 23일 전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월 25일 이른바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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