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 시찰, 시카고지방회(芝城地方會) 부회장,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미주후원회 시카고지회 선전부원,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시카고 지역 책임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05년 6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해 가파훌루 농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학업을 위해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한인영어학원에 입학하였다.
1909년 2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시찰로 임명되었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한인기독청년회 전도국장, 1914년 동 청년회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원으로 선임되어 캘리포니아주(加州) 정부로부터 북미지방총회 인허를 받아 자치기관으로 공인받는데 기여하였다. 1917년 10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 클래몬트 학생양성소 감독, 1919년 6월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20년 4월 시카고 대표로 한인유학생회총회결성발기자회에 참석하였다.
1921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부터 초등 국어교과서 편찬위원, 3월 『신한민보(新韓民報)』 명예기자로 임명되었고, 11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국민회를 이끌었다. 192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법무원, 1924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국어학교 교사, 1926년 1월 신한민보사 명예기자, 1928년 6월 로스앤젤레스국어학교 학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2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공동회를 설치하고 7인의 위원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32년 5월 대한인국민회총회 상해사변(上海事變) 임시위원부 부장을 맡아 각국에 선전문을 발송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널리 알렸다.
1933년 시카고지방회 중국인 교섭위원, 1935년 동 지방회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직된 중국후원회의 시카고지부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혁명운동 건의서'를 작성하여 국민회 집행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건의서를 통해 7개 조의 운동 방략을 제시하면서 국내외 단체가 연합하여 대혁명당을 조직하여 군사 행동과 대외 선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1939년 시카고지방회 대표원, 1940년 조선의용대 후원회 시카고지회 선전원, 1943년 시카고지방회 선전위원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시카고 지역 책임자로도 활동하였다. 1944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제2차 사우총회에서 편집부 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3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기관지 『독립』에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전체를 보자」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시기에 대해 비판하면서 민족혁명당을 확대하여 한국의 독립을 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4년 12월 해외한족연합위원회(海外韓族聯合委員會) 전체회의에 참여하여 외교위원단 대표를 선출하였다.
1907년부터 1945년까지 3ㆍ1기념금, 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