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본 관서공업학교 야간부에 재학중인 1941년에 정덕수(丁德秀)·조성인(趙成寅) 등과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에 반대하여 오직 독립만이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라는데 뜻을 모으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이들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운동 방침을 정하였는데, 즉 중·일전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영·소가 참전하게 되면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같은 계획아래 그는 동지포섭에 힘쓰는 한편 1941년 8월에는 장덕수 등과 함께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이때 당칙 및 부서와 행동강령도 정하였는데 당령으로는 장덕수(張德秀)를 추대하였다. 또한 조직확대에도 노력하여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다. 이렇듯 조직을 확대하여 항일활동을 벌이던 중 동년 10월에 동결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1942년 8월 31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