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21일 오동균(吳東均)·김창규(金昌奎) 등과 함께 고창읍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오동균과 함께 독립선언서·국민휘보(國民彙報)·조선독립가(朝鮮獨立歌) 등의 문서를 구입하여 이를 다량으로 등사한 후, 읍내 유지 및 학생들과 연락하여, 고창 장날인 3월 1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누설되어 예정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였지만, 3월 21일 오전 11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시위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한 후,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도중에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더욱 기세를 올려 군청으로 행진해 가서, 군수와 군청 직원들에게도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이해 5월 22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1926년까지 고창군 청년회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사상의 고취에 노력하였으며, 자녀들에게는 민족혼과 애국사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애국지사 이름인 김 일(金一)·김 구(金九)로 호적을 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