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6월 11일 밤 개최된 조선학생회 집행위원회에서 신현중(愼弦重)과 함께 선전조직부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이후 조선학생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학생회는 1920년 5월 결성된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의 후신으로서, 1923년 2월 9일 서울에서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학생단체이다. 학생의 단결 및 학생문제 해결, 학생 상호간의 선도와 친목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강약수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30년대 초반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래 급격히 고조되어 간 학생운동이 정치투쟁으로 전환되어 여타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강력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강약수는 1930년 10월 31일 ‘조선학생회 10주년 기념대회’ 개최, 1931년 6월 기관지 『조선학생』 창간 등을 주도하였다. 당시 『조선학생』은 일제당국에 의해 ‘불허가(不許可)’되어 모두 차압당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학생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滿洲)를 침략하였다. 강약수는 같은 달 21일 신현중(愼弦重)・이치카와(市川朝彦) 등과 함께 국제반제동맹(國際反帝同盟)의 국내지부로서 경성도시학생협의회 반제부(反帝部)를 각 학교에 조직하여 비밀결사 형태로 활동을 계속해갔다. 이들과 함께 『반제학생신문(反帝學生新聞)』을 발행하여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등 각 학교에 배포하였다. 또한 자신이 다니던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독서회(讀書會)를 지도하여 오효선(吳孝善)·윤은식(尹恩植) 등을 반제부에 가입시키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달 27일, 일본의 만주 출병(出兵)은 계획적·침략적인 것으로서 세계전쟁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반전격문(反戰檄文)을 치과의전을 비롯해 경신학교(儆新學校) 등 각 학교별로 나누어 배포하는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날 밤 일제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에 체포되었다. 강약수의 체포로 인해 서울 시내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나 이른바 ‘성대(城大)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은 경성제국대학생 등이 중심이 된 반제운동으로서 ‘조선 초유의 학원결사(學園結社) 사건’, ‘경성제국대학 공산당 사건’ 등으로 불리며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거의 1년만인 1932년 8월 15일 예심(豫審)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및 출판법(出版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미결 6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34년 1월 6일부터 1936년 3월 3일까지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아산지국(牙山支局) 인주분국장(仁州分局長)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기소되었으나, 1936년 11월 26일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았다. 또 1940년대에도 여러 차례 검속을 당한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