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의 양산군 기장읍(梁山郡機張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 때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으로서, 현상윤(玄相允)의 권고로 이날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成社) 일대에 걸쳐 연도에 모인 일반인과 상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그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과 함께 기장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11시,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일단 해산하였지만, 그는 다시 4월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50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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