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밀린 독립군은 소련·연해주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 세력들은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인 1921년 11월 17일 이학우는 중국 봉천성(奉天省) 집안현(輯安縣) 이도구(二道溝)에서 대한독립단 지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일경의 급습을 받고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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