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석하여 첫째날 오전에 연설자로 나서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한국의 3.1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한국인들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자유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한 것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독립이라는 한국인의 이상과 목적 실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남녀가 협력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결성할 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회장 톰킨스 목사와 함께 5월 23일 필라델피아 음악아카데미에서 한국친우회 행사를 개최하고, 한국의 평화로운 3.1운동을 지지하였다. 일제의 탄압 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며, 1882년 한미조약에 근거한 미국 정부의 우호적인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를 미국 대통령과 상원에 전달하였다.
1920년 3월 1일과 1921년 3월 1일, 1922년 3월 1일 오벌린대학 한국인 유학생들이 주최한 독립선언기념식에 참석하여 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1923년 태평양 연안에 사는 모든 민족의 평화와 행복을 협조하기 위해 조직된 범태평양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 27일 신간회 경성지회 주최로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세계 평화의 화인(禍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일본 경관이 강연장을 둘러싸자 “나는 이때껏 경관에게 포위되어 강연한 일이 없다”고 강연을 중단하고 “이 사실을 미국신문에 게재하겠다”고 분개했다.
1940년 브린모어대학(Bryn Mawr College)에서 은퇴하였다. 1942년 1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미국의 유력 인물들로 조직된 한미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및 이사로 활동했다. 여기서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활동을 지지하고 이를 미국 정부에 촉구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51년 5월 6일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애쉬빌에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