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린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1939년부터 산구고등학교에서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여우회'를 항일투쟁단체로 변모시켰다. 그는 독립군과의 연결을 모색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반대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비밀결사가 발각되어 1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명
-
성별
남성
본적지
전라북도 김제
생몰 연월일
1919-03-02 ~ 1997-09-01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
애족장 (1999)
활동정보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강석린은 1939년 2월부터 산구고등학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 유재우(柳在佑)·성창환(成昌煥)·민병구(閔丙九) 등과 함께 항일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의하고, 교내 친목단체인 '여우회'를 단순한 친목단체에서 항일투쟁단체로 탈바꿈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이들은 첫 작업으로 한국인 재학생과 신입생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당시 강석린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는 확신아래, 해외 독립군과의 연결을 꾀하며 국내에서도 국외의 독립운동세력과 호응하여 일시에 봉기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독립투쟁에 투신할 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해 교내에서 비밀결사 독서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독서회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당면한 현실 문제였던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창씨개명·지원병제도, 그리고 조선어폐지에 대하여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40년 7월 산구현(山口縣) 당국에 의해 비밀결사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관련자 19명과 함께 붙잡혀 1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