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가 되어 1919년 선천(宣川)의 장로회에 참석하러 갔다가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인장(印章) 등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사항을 위임하여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에 참석하는 대신 이곳에서 평안북도 각 지방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보내여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리고 이해 4월 13일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김구(金九)·조상섭(趙尙燮) 등과 같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평북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7월 8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제위원회 상임이사로 임명되었고 7월 19일에는 국제연맹청원안 기초위원(國際聯盟請願案 起草委員)으로 선출되었다. 9월 9일 임시 정부 사료편찬위원에 선출되어 9월 13일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4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9월 윤기섭(尹琦燮)·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였고 1922년 8월에는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상편을 저술하였으며 1923년 8월 상해 기독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독립정신 고취에 주력하고 1924년 중국 봉천성(奉天省) 즙안현(楫安縣)에서 《대동역사(大東歷史)》와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간행하였다. 또한 1928년 중국 동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신일소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 교육에 힘쓰는 한편 〈한족신문(韓族新聞)〉을 발행하는 등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고 한다. 그 후 1933년 4월 국내로 들어와 교향인 평북 용천에서 동상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경신소학교를 설립운영하며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광복 뒤에는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설하였으며, 1946년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벌이던 중 소련군정에 붙잡혀 1947년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