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우 일병은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불명)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서 일병은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9월 초순 부산에 설치된 제2훈련소에 입대하여 불과 10일 정도의 기초군사훈련만 받고, 제3사단 제22연대에 배치되었다. 그가 배치될 무렵 전황은 북한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제3사단은 9월 2일 시작된 북한군 9월 공세에 밀려 9월 7일 형산강변으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서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9월 14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뺏고 뺏기는 공방전 끝에 마침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연일을 탈환 후, 총 반격 태세에 들어갔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국군은 9월 16일 총반격작전으로, 9월 22일 추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서 일병과 연대 장병들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장사동-평해-울진-삼척-강릉(30일)을 탈환하면서, 일일 평균 17.3km의 경이적인 속도로 진격했다. 연대는 10월 2일 38도선을 돌파하여 일일 평균 24km의 속도로 북진하여 장전, 통천을 거쳐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단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안전한 원산 상륙을 보장하기 위해 원산 외곽선을 확보하고 잔적을 소탕했다.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에 경계임무를 인계한 연대는 11월 4일 신북청으로 북상했다. 11일 연대는 길주-백암-혜산진으로 북진하여 30일 연대의 선두부대가 한·중 국경선의 혜산진에 도달했으나, 이날 하달된 미 제10군단장의 철수명령에 따라 성진-흥남으로 철수했다. 12월 10일 연대는 흥남에서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구룡포에 상륙했다. 제3사단은 12월 20일경 홍천으로 이동하여 소양강변의 관대리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중공군은 12월 31일 전 전선에 걸쳐 제3차 공세를 감행했고, 연대 장병들은 북한군 제10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분전했으나 진지를 돌파당했다.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수원-이천-원주 선까지 철수하게 되었고, 이 때 연대도 평창으로 철수했다. 연대는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영주 남대리 부근으로 침투한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했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4차 공세(2월 공세)를 감행했다. 이 때 연대는 횡성의 섬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197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연대 장병들은 분전했으나 적의 집중공격으로 진지가 돌파당하고,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상급부대 명령에 의거 12일 원주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서 일병은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2월 12일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서정우 일병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그의 살신보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26-ㅊ-044)에 그의 이름을 새겨, 후세들이 그를 추모·기억하면서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도록 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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