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일제가 날조한 세칭 105인 사건으로 검거되어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1912년 11월에는 연길현(延吉縣) 용지사 육도구에 장석함(張錫咸)·윤명희(尹命熙) 등과 함께 영신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여 교장 조희림(曺喜林)과 함께 청년교육에 진력하였다.
1919년 1월에는 한민족 독립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불란서(france)에서 개최하는 강화회의에 파견할 간도거주 한국인 대표자 선정과 기부금 모집을 위한 위원회의 용정(龍井) 지방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2월 26일에는 간도에서 귀국하여 함흥을 방문하고 민중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는데 특히 교회계통의 인사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곳의 신창리(新昌里) 교회에 들려 함흥 기독교 제직회에 관계하는 목사와 장로 등을 모아놓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의 동향과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를 소상히 설명함으로써 이들의 울적한 가슴에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동년 2월 본국을 다녀 돌아오는 길에 회령(會寧)에서 미국인 선교사 바아커(barker)를 만나 항일운동에 지원을 부탁하고, 간도 용정(龍井)으로 돌아왔으며,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국내소식을 전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인산(因山)일을 기해서 독립선언식이 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독립선언서와 선언식순을 동지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6일 구춘선(具春先)·이봉내(李鳳內) 등과 함께 간도 국자가(局子街)에서 성대한 독립선언축하회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4월 5일 간도 국자가에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함흥과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1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유학생 중심의 기독청년회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에 귀국하여 배재·숭실·영생중학교 등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세 교육에 전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