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식 일등병은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류중식 일등병은 1951년 6월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해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5사단에 소속되었다.
류중식 일등병이 제5사단에 배치된 전후의 전쟁 상황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했다가 반격작전으로 전환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한 후 반격을 시작해 다시 38도선 일대로 진출하면서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류중식 일등병과 제5사단은 인제부근으로 진출해 중공군과 전투를 계속하면서 홍천 북방의 자은리 일대 방어선을 점령해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시기인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은 국군 제3군단(제3·9사단)을 포위해 속사리까지 70㎞를 진격했다.
류중식 일등병과 제5사단은 동측의 국군 제7사단이 큰 타격을 입고 철수하자 풍암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했다. 이어 반격작전에 참가해 속사리까지 진출한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중공군은 유엔군과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류중식 일등병은 항상 앞장서서 용전분투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류중식 일등병과 제5사단은 휴전회담과 관계없이 전투를 계속했다. 휴전회담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또는 유리한 방어선을 차지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더욱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그 시기인 1951년 10월 3일 류중식 일등병은 양구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류중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5-4-13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33-ㅅ-10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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