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식 일등병은 1919년 2월 2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의정부에 주둔하면서 동두천일대의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1연대에 입대한 후, 제6사단으로 전속되었다.
노중식 일등병의 제6사단은 전쟁 초기에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 제6사단이 선전하여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노중식 일등병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에 이어 38도선을 넘어 북진작전으로 전환했다. 노중식 일등병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노중식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제6사단은 온전한 전투력을 유지한 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선을 향해 진격했다. 전쟁 발발 이후,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노중식 일등병은 지휘관과 동료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노중식 일등병과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혹한의 날씨와 열악한 전장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2월 2일, 노중식 일등병은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한강선 반격작전 도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노중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2-ㅁ-08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림
확인
AI 자막 제공
추천 영상
서비스 최적화를 위한 쿠키 사용 안내
본 보훈문화종합포털은 통합검색, 이용자 행동 분석 등을 통해
보다 나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쿠키를 사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으며,
통계적 분석 목적 외의 용도로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