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식 일등병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8월 20일 부산 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3교육대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노중식 일등병은 카투사(KATUSA, 연합군지원한국군) 요원으로 선발되어 미군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유동적인 전선 상황에서 그는 한국군 제6사단으로 다시 전속되었다.
노중식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이 당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녕을 거쳐 영천을 점령하려는 악착스러운 공격을 동료장병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다. 열악한 전투장비와 빈약한 보급지원하에서도 부대 장병들은 오직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에 불타 부여된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노중식 일등병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에 이어 38도선을 넘어 북진작전으로 전환했다. 특히 험악한 북한의 산악지역과 적패잔병들의 끈질긴 저항을 극복하고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에 위치한 초산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장병들의 가슴에는 제6사단이 조국통일의 최선봉 부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노중식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전쟁 개입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했다. 이미 아군 후방지역까지 들어온 중공군은 10월 28일 제6사단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중공군과의 치열한 교전으로 개천으로 잠시 철수한 제6사단은 제2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노중식 일등병은 이처럼 피아가 혼재된 상황 속에서도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적의 공격에 용감하게 맞서며 자신의 진지를 지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1년 1월 1일 노중식 일등병은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노중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0-8-19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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