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복조 하사는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 11월 8일 대구 제1훈련소에 징집되어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제8사단에 배치되었다. 제8사단에 소속되어 전투현장으로 투입되었을 시의 상황은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명령이 하달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남복조 하사와 제8사단은 11월 24일 유엔군 최종공세인 크리스마스공세(1950.11.24.)에 참가하여 미 제8군의 우측 묘향산 동측방의 영원에서 회천으로 진격하자 중공군은 2차 공세(1950.11.25∼12.2)로 맞섰다. 제8사단은 중공군 42군단을 영원 북방의 양감령과 고성산 일대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중공군 제42군단을 저지하고 있을 때 맹산지역이 돌파되어 방어에 실패하고 가창으로 철수하여 손실된 전투력을 회복했다. 이 전투로 미 제8군의 동측방을 방호하는데 실패하고 3개 연대가 분산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남복조 하사와 제8사단은 12.1∼8일간 중공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려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방의 상동에서 토산-연천으로 철수했다. 제8사단은 철수 간 제16연대가 선두로 신장리 도섭장에 도착한 순간 사단을 포위한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패잔병 2개 대대규모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으나, 임진강 서쪽 520고지와 그 일대의 방어진지의 강점을 이용하여 북한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어 격퇴했다. 그러나 남복조 하사와 제8사단도 피해를 입었다. 남복조 하사는 중공군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1950년 12월 8일 남복조 하사는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토산 부근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남복조 하사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0-ㅂ-075)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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