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 수진면 고향에서 3 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동지들과 같이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임시정부 통신국을 설치하고 활동하다가 1919년 10월에는 압록강변에 평북 강변 8군(平北江邊八郡) 연통제의 교통국장(交通局長)으로 임시정부의 교통통신 임무를 맡아 정보교환, 군자금 전달, 독립운동의 방략모색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의 교제부장(交際部長)으로 그리고 평안북도 독판부(督辦府) 교통국장 등 임정 독판부의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후 상해로 건너가 1920년 2월말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교제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서간도(西間島) 출신의원에 보선되어 조덕진(趙德津) 등 12명의 임시의정원 의원(議員)과 함께 연서로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李承晩彈劾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2년 9월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서무과 간사로 임명되어 한 중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김 구(金九) 등과 같이 노병회(勞兵會)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여 한국노병회의 회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외곽에서 지원하고 독립군양성 및 군비조달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광복군 참리부(光復軍參理部) 외무사장(外務司長)에 취임하였다. 1926년 3월 10일에는 한국노병회 제20회 정기 이사회(理事會)에서 2개년 이상 회비를 납부치 않은 통상회원으로서 동회의 회칙에 의거하여 제명선포 당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