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일등병은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오직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50년 11월경 제8사단에 입대했다. 김형기 일등병과 제8사단은 유엔군 최종공세인 크리스마스공세(1950.11.24)에 참가하여 한·중 국경선을 목표로 회천지역으로 반격을 개시하자 중공군은 2차 공세(1950.11.25∼12.2)로 맞섰다. 김형기 일등병과 제8사단은 11.25~28일간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영원 북방의 양감령과 고성산 일대에서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중공군 제42군단과 격렬한 전투를 하였으나, 동남방의 맹산지역이 돌파되어 방어에 실패하고 가창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미 제8군의 동측방을 방호하는데 실패하여 중공군은 동측방으로 우회하여 청천강 남쪽으로 침입하고 미 제8군은 우측방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게 되어 전세가 기우려지게 되었다. 또한 제8사단은 3개 연대가 분산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김형기 일등병과 제8사단은 12.1∼27일간 중공군의 압도적인 공세에 밀려 제2군단의 집결지인 평양 동방의 상동에서 토산-연천으로 철수하면서 북한군 패잔병 2개 대대규모를 맞아 520고지 일대의 방어진지 강점을 이용하여 격퇴시켰다. 제8사단은 제2군단에서 제3군단으로 배속 전환하여 동부전선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제8사단은 제3군단의 책임지역인 춘천지역 우측 경운산-추전리를 연하는 선에서 방어태세를 강화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김형기 일등병은 중공군의 압도적인 공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1950년 12월 27일 김형기 일등병은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38도선 방어전투 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김형기 일등병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3-5-233)있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0-ㅇ-052)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수집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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