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천(信川) 사람이다. 1906년 안악(安岳)에서 김구(金九)와 함께 공부하다가 평양(平壤)에 있는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김구(金九)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자 항일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활동하다가 소위 사내(寺內)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김구(金九)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김구를 존경하는 후배의 이름을 대라는 말에 그의 이름을 대게 되자 1911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미결수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에도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는 한편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1916년 탈옥하여 만주 안동, 하얼빈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뒤 상해로 망명하여 이름을 황훈(黃勳)이라고 개명하였다. 1921년 중국인 임택풍(林澤豊)과 박은식(朴殷植)이 항일선전을 목적으로 한자신문 「사민보(四民報)」를 발간하게 되자 그는 회사 안에 기거하면서 박시창(朴始昌) 박경산(朴景山) 박태하(朴泰河) 김문세(金文世) 이영운(李英雲) 등과 함께 이 신문의 편집 발행을 위하여 전념하였다. 1924년 3월 8일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 제11회 정기의사회가 개최되자 그는 교민단 의원에 선출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교민단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仁成學校)교사로 들어가 진장권(陳壯權) 최무아(崔蕪芽) 등과 함께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926년 10월에 그는 인성학교 학감(學監)에 취임하였으며, 이 당시 교장은 조상섭(趙尙燮)이었다. 그는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서 적극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재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서 힘썼으며, 1931년 11월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으로 발전 해체될 때까지 독립운동자동맹 조직부장으로 김원식(金元植) 곽 헌(郭憲) 정태희(鄭泰熙)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또는 옥고를 치른 여독으로 1934년 3월 상해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본 보훈문화종합포털은 통합검색, 이용자 행동 분석 등을 통해
보다 나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쿠키를 사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으며,
통계적 분석 목적 외의 용도로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
거절 시 서비스 이용이 제한 될 수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