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0월 29일 황해도(黃海道) 곡산군(谷山郡)에서 태어나, 어릴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Oberlin College)에 재학 중인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대표자회의(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본 국민에게 보낼 결의문」 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한국 여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겪은 고난과 해방과 자유를 위하여 이어간 투쟁에 대해 연설하였다. 1919년 10월부터 미국 전역을 다니며 한국 독립을 위한 연설을 하였다. 1920년 5월 23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국 부녀와 청년 여자들의 순절」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매주 1~2차례 혹은 3~4차례씩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사정과 일제의 반인도적인 행위를 미국 사회에 알렸다. 1921년 3월 1일 ‘3.1독립선언’을 경축하기 위해 오벌린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한인 여학생 5~6명이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에는 오벌린대학 총장 킹 박사가 참여하여 한국이 독립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오벌린에서 한인구제회 지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오벌린대학을 졸업한 후 1923년부터 1935년까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의 여학생 감독, 1930년 9월부터는 교감, 1935년에는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924년 8월 뉴욕 한인교회에서 임시공동회를 소집하여 한국의 정세에 대해 연설하고, 북미 각지를 다니며 한인기독학원을 위한 기부금 2,000달러를 모금하였다. 1930년 8월 9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범태평양부인대회(汎太平洋婦人大會)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는데, 김노디는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41년 4월 재미 한인들은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과 강화를 위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열었다. 해외한족대회에서는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라는 연합기관을 설치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43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3,000달러를 요청하였다. 이에 하와이의 대한부인구제회 중앙부에서 300달러를 제공하였는데, 김노디는 쌀 한 부대를 기부하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1942년 1월 하와이 군정부는 치안부를 설치했는데, 하와이 한인사회는 미국의 국방을 후원하기 위해 ‘한인반집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인반집행위원회는 하와이 군정부가 선정한 10인의 집행위원을 두었는데, 전경무가 위원장, 김노디는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노디는 1944년 2월 1일부터 15일까지 호놀룰루 포트 스트리트에 전시공채발매 임시부를 설치했고, 미국의 전시공채를 판매하여 국방 후원에 동참하였다. 하와이의 대표적인 한인여성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의 학무(1926~1927), 외교(1927~1928, 1935~1938, 1942~1944), 중앙부장(1929~1931, 1939~1940, 1945), 재무(1935~1938) 등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국내에 들어와 1953년 11월 24일 외자구매처장에 임명되어 1955년 8월까지 재직하였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 부인구제회 의무금, 외교비, 독립특연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납부하였다. 1972년 5월 28일에 사망하여 하와이 호놀룰루 오아후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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