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하여 해조신문을 창간하고, 안중근 의사의 유족을 후원하였다. 1910년 성명회에 참여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1996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명
알렉산더최, 최비지개, 崔任增, 崔奉俊
성별
남성
본적지
함경북도 경흥
생몰 연월일
1862-07-16 ~ 1917-09-25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
독립장 (1996)
활동정보
함경북도 경흥(慶興) 사람이다.
노령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8세에 러시아 연해주 연추로 이주하여 남의 집살이로 고생하였다. 20세경에 학교와 교회당을 건축하는 한편 재러동포들의 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시부터 재산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화물선 준창호(俊昌號)의 운영을 통하여 국내 및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특히 최봉준은 생우(生牛)무역을 통하여 많은 자산을 이루었다.
1905년 국내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개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해조신문을 창간하였다. 최봉준은 「해조신문(海朝新聞)」창간호에 기고한 「발간하는 말」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보호라는 더러운 칭호를 받고 있다고 개탄하고,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의 지식을 발달시키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봉준은 「해조신문」에 막대한 기부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해조신문사의 운영은 대부분 최봉준의 기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봉준은 특히 1908년 3월 21일자에 안중근(安重根)의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을 「해조신문」에 게재하고 의거후에 안의사의 유족을 후원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될 위기에 처하자 동지 624명과 함께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성명회는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 후 조직되었다.
국권 상실의 소식이 전해지자 중심인물인 이상설은 성명회의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그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은 이를 보완하여 완성하였다. 그들은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열강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극동정책을 실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성명회는 1910년 9월 11일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당국에 의하여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