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거의할 것을 준비하였다. 본래 옹기점 보부상의 반수(班首)이었으므로 그 직을 이용하여 1906년에 거의하였다. 1907년 이후 강원도, 경기도 등지에서 활약하여 의병장으로서의 용맹을 떨쳤으며, 1907년 말경에는 한때 부하가 이백여 명에 달하였으나 그후 차차 줄어 백 명 정도를 유지하였으며, 주 활동무대는 양구 일대이었다. 1907년 12월 22일 최도환의 부하였던 박래수(朴來守)가 체포되어 심문 당한 조서에 의하면 그 당시 의진의 화력은 일본총 3정, 화승총 40정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박래수가 처음 의진에 입대하였을 때 의병장 최도환은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다. 왜 빨리 와서 우리와 같이 일해 주지 않았는가. ‥ 일본인이 다수 우리나라에 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나라를 위한 행동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후기 의병운동에 서민 의병장이 다수 출현한 것은 일본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생계 위협내지 위기의식이 촉발되어서 나타난 현상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상의 최도환의 말과 그의 출신 환경 등을 미루어 보건데 후기 서민 의병장의 전형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적에게 크게 패한 후 의진을 해산하고 심복 부하들과 더불어 피곡(僻谷)에 5년 동안 은거하였다. 한때는 간도(間島)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재기할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병이 중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와 친우의 집에 은신하면서 병을 치료하던 중 정체가 적에게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1911년 춘천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수감 이전부터 병으로 쇠약해 있었으므로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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