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복 일등상사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반월
면(半月面)에서 태어나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여 제
1사단 제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11연대는 1948년 5월 4일 경기도 수원에서
창설된 후 5월 5일 제주도로 이동하여 7월 24일까
지 한라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하고 7월
25일 수원으로 복귀하였다.
그후 연대는 1949년 1월 12일 문산으로 이동하
여 38도선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당시 연대는 제2대대를 38도선
전면(前面)인 청단, 연안, 배천, 송악산, 고랑포 일대에 병력을 분산배치하
여 진지구축과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제1대대는 연대후방에서 신병
교육을 전담토륵 하였으며, 재3대대는 인접 제15연대에 배속시켜 파견중
에 있었다. 그리고 연대본부에서는 하사관교육대 1개 중대 병력이 교육훈
련중에 있었다.
제2대대가 38도선 전면의 불리한 지형과 적의 강력한 방해를 무릅쓰고
점차 경비임무를 강화하자, 북한군은 이를 저지하고 계속적인 38도선 주도
권 장악을 목적으로, 1949년 4월 25일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
한군 제1사단 제3연대의 1개 대대 약 1천명을 송악산 후방의 냉정리(冷井
里)에 집결시켜 공격준비를 완료한 후, 5월 3일 미명을 기해 기습남침하여
송악산 일대의 292고지, UN고지, 155고지 및 비둘기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에 급보를 접한 제11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이를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제1대대 예하 제3, 제4중대를 급히 제2대대에 예속시키는 한편, 연안 방면
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연대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로 긴급 복귀시켜 5월
4일 미명을 기해 반격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공격지역이 노출된 급경사지역으로 너무나도 불리한 지형이며,
10개 소의 유개(有蓋) 토치카에서 중화기가 불을 뿜고 있어, 공격부대는
7부 능선에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대장은 적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아군진지를 회복하기 위하
여 특공대를 선발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자원한 하사관
교육대의 특공대장 서부덕 소위(당시계급 이등상사)와 이희복 일등상사(당
시계급 하사) 등 9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이리하여 특공용사 9명의 육탄공격조는 81mm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장,
치하여 만든 육탄공격용 포탄을 휴대하고 12:00를 기해 각자 목표지점을
향해 출발하였으며, 동시에 후방에서는 57mm 대전차포로 특공대의 전진을
엄호하였다.
특공대는 적의 집중되는 기관총사격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포복으로
전진하여, 박격포탄을 안고 각자 맡은 적의 기관총진지에 신속히 돌입하
여 자폭함으로써 적의 토치카를 폭파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아군 공격부
대는 14:00경 LN고지를 무난히 탈환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지원했던 박창근 하사가 292고지의 적 토치카를 수류탄
으로 단독 공격하여 분쇄함에 따라, 사기충천한 제11연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적을 공격하여 292고지 등을 탈환함으로써 송악산지구의 38도선 아
군진지를 모두 회복시켰다.
이희복 일등상사는 육탄10용사의 한 사람으로 제1차 송악산지구전투에
서 1949년 5월 4일 장렬하게 산화하였으며, 그의 고귀한 희생으로 송악산
지구의 주요고지를 모두 탈환하여 국군의 위용을 과시함은 물론 개성지역
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하사에서 일등상사로 추서하고 1952년
10월 15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를 길이 추모하고 살신보국정
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며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기 위하여 서울 국립현
충원(國立顯忠院)에 안장번호 서(西) 5-33945번으로 안장하였다.
또한 서울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내 육탄10용사 현충비(顯忠碑)와 경기
도 파주군 통일공원내에 충혼탑(忠魂塔)을 건립하였으며, 전쟁기념관 전사
자명비(戰死者銘碑)에 그의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