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호는 1895년 함경북도(咸鏡北道) 성진군(城津郡) 욱정(旭町)에서 태어났다.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중퇴했다. 1915년 10월 가족과 함께 중국 북간도(北間島)로 갔다. 1919년 3월 13일 간도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했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 및 교직원으로 구성된 맹호단에 단원이 되었다. 맹호단은 용정(龍井)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방화하는 한편 『대한독립신보』를 발행하여 한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맹호단은 5월 10일 일본총영사관에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인 경부·순사에게 퇴직을 하라고 경고문을 보냈다. 이한호는 맹호단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등지로 피신을 하였으며 1920년 3월 상하이(上海)로 갔다. 이한호는 1920년 초반 상하이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고려공산당 상해파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주비회가 조직되었다. 1922년 5월 10일 회의 소집을 선언하였다. 국민대표회주비회에서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참가대표를 지방대표와 단체대표로 나누었다. 이한호는 ‘맹호단’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 6월 8일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 모이당(慕爾堂)에서 개최된 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국민대표회주비회를 적극 후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미국인 예배당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정식으로 개최되었다. 이한호는 4월 3일 맹호단 대표로서 토론에 참여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총 63회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의견이 대립되어 여러 차례 회의가 유회되다가 5월 15일 회의를 끝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가 끝난 이후 이한호는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했다. 이후 유럽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독일 카를스루에(Karlsruhe) 대학 공과에 들어갔다. 1925년 여름 스위스 취리히에 갔다. 취리히대학 법과대학에 적을 두고 경제학을 청강하면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이승만이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이때 이한호는 1933년 3월 5일 이승만이 묵고 있는 제네바의 호텔로 갔다. 이승만은 4월 13일 이한호의 초대를 받고 취리히를 방문하였고, 이한호 부부와 그의 처형부부인 뮬러를 만났다. 해방 이후 이한호는 서독주재 초대 총영사로 임명되었고, 1960년 스위스 아펜젤(Appenzell)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본 보훈문화종합포털은 통합검색, 이용자 행동 분석 등을 통해
보다 나은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쿠키를 사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으며,
통계적 분석 목적 외의 용도로는 절대 사용되지 않습니다.
거절 시 서비스 이용이 제한 될 수 있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