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