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갑은 함북 명천 출신으로 대한제국 내장원경 이용익의 손자이다. 서북학회를 창립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경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고, 권업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7년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명
-
성별
남성
본적지
함경북도 명천
생몰 연월일
1887-04-17 ~ 1932-03-28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
독립장 (1962)
활동정보
함북 명천(明川) 사람이다.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낸 이용익(李容翊)의 손자이다.
이 갑(李甲)이 창립한 서우학회(西友學會)와 그의 재정적 지원으로 설립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합동하여 서북학회를 만들고 평의원이 되어 1만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월보를 간행하고 유능한 청년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1906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맞이하여 이동녕(李東寧)·이 갑(李甲)·이승훈(李昇薰)·윤치호(尹致昊)·전덕기(全德基)·안태국(安泰國)·조성환(曺成煥)·최광옥(崔光玉)·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비밀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7년에는 서울에 경성(鏡城)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0년 12월 일제가 소위 105인사건을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 하자, 1911년 이른 봄 이 갑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안창호·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책을 논의하였다.
다시 노령지역으로 망명한 그는 1912년 12월 이상설(李相卨)·김 립(金立)·김도여(金道汝)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설립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톡의 한인교육을 위하여 한민학교(韓民學校)의 설립에도 공헌하였다. 1917년 상해로 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강제로 국내에 송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