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북 구성(龜城) 사람이다. 이신애는 1913년 개성(開城)의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를 졸업한 뒤 원산(元山)의 성경여학교(聖經女學校)를 거쳐 기독교 전도사가 되었고 3 ·1독립운동 때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1919년 9월 강우규(姜宇奎)가 조선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에는 한기동(韓基東)과 함께 강우규를 수차에 걸쳐 방문하여 거사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동년 10월 초순에는 한기동의 권유에 의해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동단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1919년 3월 말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결성한 대동단은 동년 10월 초순경 동단의 본부를 상해(上海)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과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했다. 3·1독립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목적으로, 이들은 거사 내용과 방법도 3·1독립운동의 방식을 쫓아 진행시켰는데, 이때 이신애는 여성대표의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한편 박정선(朴貞善) ·한일호(韓逸浩) 등 여성대표를 포섭했고 또 김상열(金商說) ·김익하(金益夏) 등 다수의 인사를 동단에 가입시켰다. 그런데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친왕(義親王)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사전 탐지되어 동년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붙잡혀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포위망을 피한 이신애는 나머지 인사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강행·추진해갔다. 그리하여 동년 11월 28일 이신애를 비롯한 정규식(鄭奎植) ·박정선 ·나창헌(羅昌憲) 등 열혈 인사들은 종로 안국동(安國洞) 광장에서 준비해 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면서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쳤다. 만세시위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이신애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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