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경남 마산의 유지로 1906년부터 창신학교(昌信學校)의 전신인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창신학교는 표면상 기독교 선교사에의한 선교학교 형식으로 운영되었으나, 실질적 운영에는 독서숙의 설립자인 그의 역할이 컸다. 일제는 민족교육의 온상지인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해 소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였는데, 이에 의해 한국인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은 규제되었던데 비해 외국인에 의한 선교학교의 경우 비교적 설립이 용이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청신학교는 이승규와 같은 민족적 지사에 의해 운영되었고, 민족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마산은 일제의 침략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일제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일찍부터 마산을 중요 거점지로 삼아 상권과 아울러 군사력을 집중시킴으로써 식민기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던 마산에서 창신학교를 중심한 민족교육의 영향을 항일투쟁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한 배경아래 3·1운동때 마산의 만세운동은 창신학교를 중심한 기독교계통이 서울과 연결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때 기독교 지도자였던 그는 마산의 만세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서울에서 3·1운동 계획이 진행되던 1919년 2월 23일 그는 서울에서 파견된 이갑성(李甲成)과 만나 만세운동을 계획해갔다. 그리고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任學瓚)·기독교 장로 이상소(李相召) 등이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해 갔다. 이갑성이 다녀간 뒤 2월 26일에는 배동석(裵東奭)이 서울에서 다시 마산에 파견되어 3·1운동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면서 마산의 만세운동은 창신학교와 의신학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때 창신학교의 만세운동 계획은 이승규의 집에서 밀회를 거듭하여 이루어졌고, 또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장날인 3월 21일 거사일로 정하였으며, 거사 당일 3천여 명의 군중이 동원되면서 만세시위는 불같이 일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중포병과 헌병을 동원하면서 무력 진압을 자행하였고, 50여 명의 인물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힌 이들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하여 많은 학생들이 석방될 수 있었다. 3·1운동 후 독립운동의 분위기는 변화되는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1921년에 워싱턴회의가 열릴 때 국내외 독립운동계는 한결같이 워싱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제기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계에서는 국내외 지도급 인사들이 서명하여 워싱턴회의에 부치는 서한을 작성하고 보냈는데, 이 때 그는 마산지역의 대표로 서명하는 등 항일투쟁에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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